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당시 성도가 만명이 넘는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랐습니다.
제가 자란 교회에서 부목사의 사모가 되어 어색했지만..환경적으로는 너무나 편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1996년에 미국으로 이사를 와서 8개월만에 하나님은 담임목회지를 허락하셨고...
일리노이주의 아름다운 작은 마을에 위치한...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습니다.
처음 담임목회를 시작한 시절이 어려운 환경이였지만...
(쌀도 사먹기 힘든...먹고 싶은것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것 입지 못했고, 아이들에게는 버리는 종이가 장난감이였던 시절.....)
단지...저에겐 새로운 환경, 새로운 만남이 두려웠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은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셨죠.
바로 프래드 윈터스 목사님 가족입니다.
저희가 새 들어 있던 미국교회(First Baptist Church of Maryville) 담임목사님 가족입니다.
미국교회는 살아있는 움직임 속에 성장을 계속하고, 큰 성전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프래드 목사님과 저희 목사님은 나이도 비슷했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같았습니다.
(둘이 만나면...웃음이 넘치고 선교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저희 목사님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잔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프래드 목사님은 형제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돕고 싶어서...
저희 목사님에게 미국교회 스탭으로 들어와 줄 것을 부탁했고,
저희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프래드 목사님은 생각하다...생각하다...고민끝에 저희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자기의 두 딸(2살, 4살) 케시디와 앨리사를 돌 봐 달라고...
하지만...이해가 안된것은 미국교회는 자체 유치원과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둘째 딸 캐시디는 2살로 대소변 훈련을 잘해줘야 할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저희집이랑 거리도 왕복 1시간을 운전을 해야 합니다.(제가 운전 면허가 없었던 때라..)
매일 신디 사모님은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데리고 가고..
시간당 계산해서 저에게 주시는 거였어요..
저희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크레용이랑 종이에...몇가지 장난감...외에는..
가끔씩 아이들 사이에 자잘한 사고도 있었지만...
오히려 당황하는 저에게.. 밝은 미소로 괜챦다고 했던 신디 사모님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것도 저는 도운 게 없습니다.
(아이들 가방에는 간식에 도시락까지..제가 뚜껑만 열면 되게 준비를 다 해 보내주었으니까요.)
그렇게 1년 가까이를 아이들을 돌보았고....저는 그렇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목회지가 바뀌었어도...적어도 1년에 한번은 가족이 함께 만나..
행복한 만남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서로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해서...나름대로 음식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지요.
지금도...프래드 목사님의..."미쌔스 리...김..치...맛있어요.." " 불..고..기.. 맛있어요..."
하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엘에이에 이사오기 전에 서로 연락을 하며..
프래드 목사님은 남침례회 일리노이주 주총회장이 되어있었고, 사모님은 일리노이주 상담 총책임자로
바쁜 일정인지라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서로 축복하고 아쉬워하면서 언제 다시 만나자 했던 것이.....프래드 목사님과의 마지막입니다.
얼마전 2009년 3월 8일 주일...주일 1부 예배에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프래드 목사님이 강단을 향해 올라가고 있던 때에...
어느 정신이 이상한 청년이 총을 처음엔 목사님의 성경책에(종이들이 흩어져 날렸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프래드 목사님을 향해... 쏜것입니다.
처음엔...교인들도...퍼포먼스인 줄 알고 있다가 사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날...저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 소식을 알게 되었고...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저에게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사랑을 받았기에...그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장례식에 당장 가고 싶었는데 못갔습니다.
무엇보다...신디 사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니...무너져내리는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이 뉴스는 미전국 뿐아니라..한국에까지 보도가 된 큰 사건이였습니다.
하지만...신디 사모님은...TV나 매스컴을 통해서도....프래드 목사님은 하나님나라에 승진되어 갔다고...하면서 오히려...감사하는 모습을 보였고,
장례식장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찾아온 가운데....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난 4월에 저희 가족은 신디 사모님을 위로한다는 한가지 목적으로...
가족이 모두 그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저희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였지만..)
레스토랑안에서 식사를 하는 함께 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신디 사모님 얼굴을 알아보고 찾아와 신디 사모님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냅니다..
그때마다 미소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 신디 사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맘이 아파왔습니다.
미소 띤 담담한 모습속에...담긴...그 아픔을 알기에...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그때 고마웠어요...정말예요...사랑합니다.."
그리고 밤새 고마운 마음을 노트 종이에 적어서 주었습니다.
프래드 목사님의 묘에 가는 길에...색색가지 색깔의 꽃을...사가지고 갔습니다..
(동네에는 꽃집도 없어서 월마트에 가서...너무나...작은것을 사들고 갔습니다.)
그 날따라 살을 도려내듯....바람이 쌀쌀했고 추웠습니다.
저는 신디 사모님을 끌어 안았습니다...(프래드 목사님이라면...벌써 안아주셨을텐데...)
그때...신디 사모님은...남편의 묘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흐느끼며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은 내가 아는 밝은 웃음의 신디 사모님이 아니라..너무나 연약한 모습이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게...무얼까요.... 말없이...끌어안고 울기만 했습니다.
신디 사모님은...말했습니다...
프래드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에 간지 한달이 지나고.. 사람들 사이에 관심이 차츰 멀어지는 시간...그리고 그 후로도 사단의 영적공격으로 힘이들었는데..
이목사님 가족을 나에게 보내주셨다고...위로가 되었고 너무 감사하다고 합니다.
두 딸은...이제 14살,12살이 되었는데...아빠가 없는 이 시간이 아직은 힘들고..밤이면 무서워 잠을 못잔다고 합니다....(아빠가 워낙...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했기에...)
저는 한가지는 확실하게 약속을 했습니다...
평생...신디사모님과 엘리사와 캐시디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그리고 하나님안에서 잘 될꺼라고..
사랑을 받을 때가 있고...사랑을 나누어 줄 때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물론...프래드 윈터스 목사님을 잠깐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어 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살...우리는 한가족입니다.
얼마전...세인트 루이스 카디날스 야구경기에서 경기를 마치고...
그곳 경기장에서 신디 사모님의 특별 간증 시간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증을 마치는 순간...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주님께 영광의 박수를 드렸다고 합니다.
저는 신디 사모님이 잘 이겨내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닮은 프래드 윈터스 목사님 가족은
지금까지 행복하게 주님일을 감당할 수 있는 만남의 축복입니다.
"신디 사모님.. 사랑해요...앨리사..캐시디..사랑해.."
프래드 윈터스 목사님, 신디 사모님,엘리사(14살.앞),캐시디(12살.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