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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보다 더 중요한 것(이상래 목사)
2012.08.14 01:10
산행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바위든 나무든 자신의 이름을 새겨 그곳에 자신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산타 아니타 트레일에 있는 Sturtvant Fall은 한국 설악산에 있는 비룡폭포처럼 낙하하는 높이도, 물이 고인 곳도 비슷해서 자주 찾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여러 개 있지만 유독 몇 몇 나무는 사람들이 그곳에 왔던 흔적들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날짜와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 넣은 사람도 있고, 함께 왔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도 있습니다.
물가에는 그 나무 하나뿐이어서 그런지 이 나무는 상처도 많고 흔적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뿐이 이 나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곳에서 우뚝 솟아 그늘을 만들고, 봄이면 예쁜 연두빛깔의 나뭇잎을 피워냅니다. 그곳까지 1.8마일을 걸어가야 하는데 그곳에 가면 이마와 등엔 땀이 송송 배이게 되는데 시원한 바람과 그늘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에 가까이 가보면 나무는 온통 사람들이 새겨 놓은 여러 가지 흔적들로 때로는 알몸이 드러내기도 하고,어떤 흔적은 세월이 지나서 어떤 글자를 새겨 넣었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또 어떤 흔적은 최근에 새겼는지 나무껍데기에 움푹 파일 정도로 깊게 새겨놓기도 했습니다. 그 나무를 살펴보다 몇 가지 나무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나무는 아무리 상처가 많기는 하지만 상처보다 나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대부분 손이 닿은 곳까지만 흔적을 내지 그 위에 올라가서 글자를 새겨 넣는 사람은 거의 업었습니다.
둘째, 흔적을 새겨 넣을 나무는 작은 나무가 아니라 대부분 큰 나무였다는 것입니다. 작은 나무에는 흔적을 새겨 넣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글자를 새겨 넣을 나무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큰 나무가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적을 아파하지 말고 그만큼 자라있는 나무를 보는 것이 더 축복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셋째, 글자를 새겨 넣는 나무는 대부분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바위 옆 그늘진 곳에서 쉴 수 있는 곳이라든지 폭포가 떨어지는 물가 옆에 잘 자란 나무에만 글자가 새겨 있을 뿐 산속에 있는 나무나, 비탈길에 있는 나무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흔적을 새겨 넣는 나무는 좋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의 사랑도 그만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나무가 자라면서 그 흔적 또한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자신에게 상처 준 그 흔적들을 감싸 안고, 자라다 보니 글자마저도 형체를 몰라 볼 정도로 변해 있었고, 그 자리에는 나무껍질로 채워져 있어서 어느덧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져 있었습니다. 나무에게는 이러한 흔적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그 흔적 때문에 그 상처 때문에 자라지 못하고 그렇게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흔적과 상처는 자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 혹은 꿈과 희망이 깨지는 아픔과 고통…….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처가 아무리 커도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와 싸우면 미워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아파하기 보다는 자라다 보면 나무와 같이 그 흔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메워지기도 하고, 나무가 자란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초라하게 보일 것입니다. 상처가 있다면 상처와 싸우지 말고 자라기 위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성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