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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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3월 28일 고(故) 김창걸 목사님(관리자)
2012.08.13 05:11
목사로서 제일 부러운 것이 있다면 바울의 고백한 것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장 7, 8절)처럼 그러한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목회자로서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3월 25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우리의 사랑하는 김창걸 목사님께서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중국에서 태어나셔서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셨습니다. 일본의 통치가 끝나고 목사님은 가족들과 한국에 돌아와서 생활을 하셨는데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일반 잡지인 “주부생활”이라는 잡지의 기자로 오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영락교회에 출석하시면서 후에는 기독교 신문인 “기독공보”의 편집장으로 오랜 시간을 문서 선교를 감당하시기도 했고 교회에서는 청년들을 맡아 사역하셨습니다. 일본으로 선교사로 떠나셔서 사역을 하셨고, 안식년에 미국으로 오셔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모님의 병환으로6년 전 이곳 LA에 오셨다가 저희 교회에 출석하셨고, 4년전 사모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고, 오늘 아침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줄 곳 선교에 많은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후에도 일본 선교를 꿈꾸셨고, 실제로 목사님은 일본에 가셔서 6개월 동안을 일본 농촌에서 목사님이 없는 한 교회에 가셔서 사역을 감당하시기도 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못해 돌아오신 후에도 일본 선교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이 토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다면 다시 한번 주어진 여생을 선교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간을 보내시고 싶다는 목사님의 바람을 피력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연세는 있으셨지만 꿈이 넘치는 그런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셨던 목회자였습니다. 새벽기도에 자주 오지 못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셨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시려 무던히도 노력하셨던 목사님이셨습니다. 저에게는 설교를 마치고 나오시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는 저에게 큰 힘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스웨터 한 벌을 가지고 목사님은 감격해서 긴 장문의 감사 편지를 보내 주신 따뜻한 성품을 지니신 목사님이셨습니다.
한 달 전쯤 몇 명의 바울회 성도님들과 함께 찾아 뵀을 때 무척 수척해지신 모습과 걷기에도 힘든 발걸음을 지팡이에 의지해서 오신 모습이 떠오릅니다.목사님은 힘든 발걸음 소에서도 저희 일행을 반겨 주셨고, 찾아와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심도 많이 먹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가보자고 말씀하시면서 같이 점심식사를 하셨는데, 처음에는 절반도 못 드시겠다고 하시던 분이 기분이 좋으셨는지 2/3나 잡으시면서 기뻐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난 주 전화 통화가 마지막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아쉬움 속에서도 한 가지 위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주님 앞에 선 목사님은 승리의 용사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의 자녀가 되어 굳게 서 있을 줄 믿기 때문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신 목사님! 이제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남은 가족들은 아버님을 잃어버린 아픔과 고통을 영생의 소망과 부활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